`23.03.20~`23.12.22까지 영남대학교 멋쟁이사자처럼 대표로 활동했던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 목차
1. 서론
2. 활동 내용
3. 후기
1. 서론
아직 활동이 끝난 건 아니지만, 멋쟁이사자처럼은 1학기면 공식 일정이 모두 끝나는 특성이 있다보니
사실상 동아리 활동은 거의 중지되었다고 무방하다.
해당 포스팅에 추가할 내용이라 해봐야 12월 말에 자체 수료식 사진을 추가하는 정도라, 기억이 가물가물 해지기 전에 정리해두려 한다.
후기가 아니라 회고라고 적은 이유는 멋사 활동 기록이라기 보단, 23년 올 한해를 전반적으로 돌아본 일기장에 가까운 수준이라.
혹시나 멋사에 들어가기 위해 알아보다가 들어오신 분이라면, 그런 정보 없으니까 나가시면 됩니다.
📌 왜 대표직을 맡았는가?
나는 이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
요새 좀 잘 나가는 컴퓨터 공학과에 다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실력도 없이 주제 모르고 우쭐 거리는 학생들이나,
중앙 동아리는 커녕 과 동아리 조차 제대로 된 개발 동아리 하나 개설되어 있지 않은 처참한 실정.
얼마나 노력을 했건 수능을 실패해서 이 학교에 들어온 사람으로서,
"네가 좋은 학교를 갔으면 됐을 거 아니냐"라는 말을 한다면 솔직히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한동안은 변명을 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저 받아드린다.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을 아무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누군가가 바꿔야 한다면 그것이 나여야 할 거라 생각했을 뿐이다.
내 실력이 월등하다거나, 우월감 혹은 영웅 심리에 취해서는 절대 아니다.
난 지금껏 단 한 번도 내 실력에 안주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끊임없이 지식을 갈구한다.
하지만 내가 코딩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상상을 현실로 구현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나의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고 싶었다.
일부의 분위기를 바꿔놓음으로써, 이 학교 전체의 면학 분위기를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엔 그저 그런 신념인지 소망인지 모를 생각 하나만으로 대표의 역할을 자처했다.
📌 11기의 초기 상황
그야 말로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 인력의 제한: 지금껏 선발 인원이 적었기 때문에 11기 운영진 수 또한 적었다. 5명이서 함께 했지만, 사실상 가용 인원은 2~3명에 불과했다.
- 공간의 제약: 교내의 어떤 동아리에도 정식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아 강의를 진행하기 위한 동방을 얻을 수 없었다.
- 중앙 동아리 등록은 멋쟁이사자처럼 내의 규칙과 충돌이 많아 실패했다.
- 과 동아리 등록은 멋쟁이사자처럼이 "비전공자"들도 대상으로 하며, 애초에 대표인 내가 복수 전공자라 기각되었다.
- 과 사무실, 단대 사무실, 학생회까지 모두 건의 해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교수님께도 메일을 드려보고, 심지어 부모님의 예전 후배 교수님께도 연락을 드려봤으나 실패했다.
- 개인적으로 내게 흥미를 가지시던 컨설턴트 분께 학생처에서 제공하는 스터디룸의 존재를 듣긴 했지만 모든 인원을 수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 결국 중앙 도서관 세미나실과 학교 근처의 단체 세미나실(유료)을 대여하는 방법으로 대체했다.
- 시간의 제약: UX/UI, 프론트, 백엔드 모든 강의를 내가 맡아서 하기로 했기 때문에,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중앙 도서관 세미나실 대여를 위해선 반드시 오후 7시에는 강의를 진행해야만 했다.
- 정보의 제약: 영남대 멋사는 대략 7기부터 활동을 시작한 듯 했지만 아무런 인수인계가 없었다. 각 기수는 모두 단절되어 있고, 서로 커넥션을 맺을 방도조차 없었으며, 강의 커리큘럼이나 동아리 운영 중 발생한 돌발 상황에 대한 해결 과정 혹은 메뉴얼이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 영남대 멋사 11기의 트랙과 인원수
UX/UI | FE | BE | 총합 | |
인원 수 | 4 | 12 | 8 | 24 |
장담하는데, 전국의 62개 대학 중에 우리가 운영진 수가 제일 적었을 거라 장담한다.
그리고 운영진 수 대비 아기사자의 수가 가장 많았을 것 또한 자부한다.
(수치 상으로는 1:5지만, 1명은 거의 참여가 불가능한 상태여서 1:6이었다.)
이는 이 학교의 개발자 커뮤니티를 확장시키고, 전체 면학 분위기를 뒤엎어버리겠다는 나의 포부였다.
2. 활동 내용
• 홍보 및 면접
• OT
• 강의
• 과제
• 중앙 해커톤
• 경북 해커톤
• 멘토링 및 스터디
📌 대표 미팅
2월 초에 서울에서 각 학교의 대표들이 모이는 시간이 있었다.
대충 운영 계획과 각 권역별 대표들끼리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사실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 딱히 기억도 안 난다.
다만, 여기서 알게 된 건 다른 학교는 대부분 운영진이 두 자리 수였다는 점.
아무리 적어도 평균 7명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만큼 트랙별 책임자에게 권한이 분산되어 있어서, 대표들이 각자 어떻게 인원들을 통솔할 지에 대한 계획은 많이 약한 것 같았다.
우린 중앙집권제 였으므로 그런 걱정은 없었다. (나만 잘 한다면)
📌 홍보 및 면접
개강 직전에 포스터를 이곳저곳 붙이고 다녔는데, 대부분은 존재도 몰랐다는 슬픈 현실.
10기에는 포스터를 보고 참여한 인원이 몇몇 있어서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번 기수는 대다수가 지인들의 추천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10기에 활동했던 운영진 및 아기사자 분들께서 11기 가입을 적극 권유해주셨다고 한다.
그 이유가 하나같이 똑같았는데, "이번 기수 대표님이 엄청 열정적인 분이셔서 배울 게 많을 거다"라는 말이었다.
제법 감동이긴 했는데, 막상 전해들으니 머쓱해지긴 매한가지.
3월 중순 부터는 1차 서류전형, 2차 비대면 면접으로 인원을 선발했다.
원래는 18명을 선발할 계획이었으나,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한 팀(6명)을 더 뽑기로 결정하여 24명을 선발하였다.
서류는 결격 사유만 없으면 웬만하면 통과시켜줬고, 면접 때는 죄책감이 가중되어서 더 신중해졌다.
아무래도 지원자의 얼굴을 보고 난 후에 떨어트리겠다고 결정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형평성과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고자 면접 영상을 수차례 돌려보고 결정했지만, 그래도 죄책감은 딱히 사라지질 않았다.
한 때, 비전공자였던 입장으로서 되도록 비전공자에게 많은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개발과 관련된 포트폴리오는 일절 받지 않고, "무언가에 깊이 몰입할 정도로 열심히 해본 일이 있는가?"가 주된 관심사였다.
무언가에 열중해본 경험이 있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세렝게티에서에서 겪을 고초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거란 심산이었다.
📌 OT
첫 시간부터 잔소리 타임.
회식 때는 "3년 후의 재서님의 모습이 궁금해지네요"라는 질문에 "과로사로 죽었을 걸요"라는 화기애애한 대화도 나누었다.
내 목적은 잘 하는 사람 뽑아서, 쉽게쉽게 굴러가는 동아리 운영이 목표가 아니었다.
한명한명이 각자의 개발 철학을 가지고,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개발자가 되길 바랬다.
그리고 나 조차도 뛰어넘어서 내가 현실에 안주하지 못 하게끔 만드는 라이벌이자 동료를 직접 양성하고자 했다.
📌 강의
첫 2주는 통합 트랙.
그 다음 4주 간은 FE/BE/UXUI 각각 1주에 1번씩 대면 강의로 진행했다.
모든 강의를 내가 진행해야 했으며, 가장 큰 문제는 방학 때까지 고작 트랙별 교육을 4번밖에 수행할 수 없다는 제약이 너무 컸다.
학교 식 단방향 수업을 원치 않았지만 그것 말고는 방도가 없었기에, 강의 자료를 작성하고 앞에서 열심히 설명을 하고 다녔다.
UX/UI의 경우, 디자이너 운영진이 갑자기 사라진 관계로 내가 책임지게 되었다.
그래서 급한 대로 "하루 5분 UX"라는 책을 2주만에 독파하고, 코드잇에 올라온 강의를 모두 수강하여 정리하였다.
UI는 솔직히 포기했고, UX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성향이 강해 나름 재밌게 공부했었다.
저작권 문제로 인해 블로그에 올리진 못 했지만, UX와 관련해서는 정말 심도있게 설명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다만, UI 측면이 굉장히 취약했는데, 탈주했던 디자이너를 살살 꼬드겨서 UI 피드백만이라도 해주기로 약속을 받아냈었다.
애초에 UI는 그냥 카피 라이팅 많이 해서, 디자인 많이 해보면 는다고 생각을 해서(개발자의 시점..) 과제로 많이 굴렸었다.
⚔️ 실수를 용납할 수 없었던 광기
두 번째 HTML 강의를 진행할 때, 나는 굉장히 오만해져 있었다.
별 다른 준비 없이 첫 번째 강의를 수월하게 끝마쳤고, 강의를 들은 아기사자들의 반응도 썩 괜찮았다.
그래서 'HTML 같은 거 그냥 프리스타일로 하면 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으로 강의실에 들어섰는데, 역대 내가 했던 발표를 통틀어 최악의 강의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게 너무 수치스러웠던 나머지, 앞으로 모든 강의에 대해서 기획서를 선작성 후, 각 트랙의 운영진들이 확인을 하는 단계를 거쳤다.
그 다음에 강의 자료를 작성하고, 이 또한 다시 운영진들의 컨펌을 거치는 단계를 거쳐 강의실에 들어서게 되었다.
덕분에 화공, 컴공 복전에 학점도 4점대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겹쳐서, 굉장히 극심한 체력난에 시달리긴 했지만 어찌저찌 버텨냈었다.
🧐 왜 질문을 겁낼까?
나는 당연히 아기사자들의 역량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질문을 겁내지 말라고 거의 주에 한 번 꼴로 이야기 했는데도, 대다수의 인원이 질문하기를 꺼려했다.
나름 직설적이라고 생각하는 말투도 많이 순화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불구하고 변화가 없어, 한명한명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고 원인을 파악한 후 개선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다.
- 멍청한 질문 같아서 못 하겠다.
- (답변) 전자의 경우엔 쉬운 문제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게 멍청한 거고, 질문해서 빠르게 해결하는 게 현명한 겁니다. 그리고 가끔 질문하다가 자문자답 하신 경우도 있을 거예요. 혼자 고민할 땐 절대 해결 안 되다가, 질문을 하다보면 생각이 정리되면서 혼자 해결할 때도 많습니다.
제가 여러분보다 멍청한 질문 더 많이 하고 다닐 걸요? 전 교수님한테 다이렉트로 궁금한 거 다 여쭤보는 사람입니다. 제가 더 하면 더 했어요
- (답변) 전자의 경우엔 쉬운 문제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게 멍청한 거고, 질문해서 빠르게 해결하는 게 현명한 겁니다. 그리고 가끔 질문하다가 자문자답 하신 경우도 있을 거예요. 혼자 고민할 땐 절대 해결 안 되다가, 질문을 하다보면 생각이 정리되면서 혼자 해결할 때도 많습니다.
- 뭘 모르는 지 몰라서 질문을 못 하겠다.
- (답변) 본인이 모르는 게 뭔지 파악하는 게 원래 가장 어렵습니다. 그걸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정도면, 이미 해답까지도 스스로 찾아가실 수 있을 정도예요. 뭘 모르는지 길을 알려드리는 게 운영진 역할입니당.
- => 이건 요새 아기사자들이 적응을 했는지, "재서님한테 일단 물어보면, 내가 뭘 물어보고 싶은 지도 찾아준다"라고 소문이 퍼졌다. (실상은 소크라테스 산파법으로 공격한다.)
- 노오오오오력을 안 하는 것처럼 보여서 못 하겠다.
- (답변) 정보를 찾는 방법을 몰라서 그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에러를 보더라도 그걸 정보로 활용하는 사람이 있고, 뇌정지부터 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예요. 경험이 부족하면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래서 멋사 초반 강의할 때부터 여러분들이 질문을 하시면, 해답을 알려드리기 보다 힌트를 많이 드렸어요. 힌트에 대한 해답을 찾아오시면, 그 다음 단계에 대한 힌트를 또 던져드리면서 스스로 단계를 밟아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게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 (답변) 정보를 찾는 방법을 몰라서 그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에러를 보더라도 그걸 정보로 활용하는 사람이 있고, 뇌정지부터 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예요. 경험이 부족하면 당연한 현상입니다.
- 교수님한테 질문 드리는 거 같아 무섭다.
- (답변) 🦁.....
이 외에도 내 리뷰가 너무 마침표로 많이 끝나서 더 그런가 싶어, 청유형으로 많이 바꾸기도 했다.
요새는 대부분 거리낌 없이 질문을 많이 하길래, 그 땐 왜 그렇게 질문을 안 했냐고 물었더니
마지막 이유가 가장 컸다고 한다.
내 말투랑 분위기가 교수님 같대....
📌 과제
매주 강의마다 과제가 하나씩 나갔는데, 단순히 제출만 하고 끝이 아니었다.
제출 전에는 반드시 한 명 이상의 다른 아기사자의 리뷰를 받아와야 했고, 리뷰 내용에 대해서도 첨부하도록 했다.
개인적으로 42Seoul에서 서로 리뷰를 해주었던 게 너무 좋은 경험으로 남아 있어서, 꼭 도입하고 싶은 체제였다.
물론 리뷰를 처음 해보는 사람들끼리 매칭이 되면 다소 부족한 점들도 많이 보였지만, 그 때의 경험이 정말 좋았다는 것에는 아기사자들도 이야기해주는 걸 보아 옳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과제의 난이도는 다소 높게 잡았다.
강의 내용을 기반으로 잡되, 추가적으로 구글링을 하여 해결해야 하는 정도의 문제로 출제했다.
📌 방학 일정
각 트랙 별 기초 교육이 끝났지만 여전히 많이 부족한 상태였다.
백엔드와 프론트 모두 각자의 파트에 대한 실력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였고, 특히 서로 간에 협업이 일절 없던 상태여서 이대로 실전을 맞이하면 처참한 결과가 날 것은 뻔했다.
그래서 "블로그 만들기"라는 주제의 토이 프로젝트를 통해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 아이디어톤
완전히 시험 기간에 겹친 행사여서 아무도 참여를 안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아기사자들을 무의식 중에 과소평가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행사가 되었다.
시험이 끝나고 종강한 당일에 참여가 가능한 인원만 와도 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아기사자가 참석하여 각 팀의 발표를 들었다.
그리고 서로 간의 질의응답을 갖는 시간도 있었는데, 질문의 수준이 생각 이상으로 높았다.
동아리 활동 중에 가장 즐거웠던 시간.
이후 여기서 선발된 팀이 경북권 그룹 아이디어톤에서도 우승하여 본선에 진출했고,
전국 아이디어톤에서 5등을 달성했다. (4등까지가 상금이 주어져서 아까웠다.)
사실 처음부터 비지니스 모델이 너무 약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이야기 해줬었다.
그런데 어찌저찌 2차도 뚫고, 3차에서도 5등이나 차지한 게 더 신기했다.
📌 중앙 해커톤
중앙 해커톤..할 말은 많지만,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 당할까봐 차마 여기 적진 못 하겠다.
내가 이 행사 때문에 몇 번을 싸워댔는지 세기도 힘들 정도지만,
그냥 별 탈 없이 잘 마무리 된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 경북 해커톤
경북대, 영남대, 계명대, 금오공대, 한동대 총 5개 대학이 모여서 진행한 경북 해커톤.
처음 예상 인원보다 너무 적은 수의 인원이 참여해서 운영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였지만, 우리 학교에서 많은 지원자가 나와서 다행이었다.
중앙 해커톤과의 차별성을 보이기 위해서 준비 단계부터 정말 애를 많이 썼다.
어차피 상금을 타는 것이 주 목적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여, 식사비와 간식비와 같은 편의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심사위원을 초빙하기 위해, 이전 기수 멋사 인원들에게 건너건너 연락을 돌렸는데 다들 황금같은 주말을 포기하고 대구까지 내려와서 심사위원을 자처해주셨다. (진짜 감동)
네이버, 삼성, 롯데에서 근무하는 초호화 심사위원이 앞에 있으니, 뭔가 좀 있어 보였다.
대표들끼리 모여서 진행을 해서 그런지 모든 것이 속전속결.
내가 살면서 진행한 팀플 중 이보다 환상적인 경험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한동대에 UXUI 파트의 1학년 중에 정말 장래성이 출중한 아기사자가 보여서,
UX에 대한 몇 가지 조언과 읽어볼 만한 책도 추천해주고 왔다.
📌 멘토링 및 스터디
다른 학교 실정을 들어보니, 대부분은 2학기가 되고 동아리가 제 기능을 잃을 정도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1학기의 공식 일정이 끝나면 이렇게 될 걸 이미 상정하고 있었기에, 곧장 멘토링과 스터디를 마련했다.
- 스프링 부트 멘토링
- 실전 코테 멘토링 & 종만북 멘토링
- 스위프트 스터디
이 외에도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온갖 취업 공지, 인턴 공지, 대회 등을 단톡방에 주기적으로 올리기도 하고(실제로 인턴을 하신 분도 계시고 스타트업과 연계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소식을 전해들었다.),
...잔소리도 엄청나게 많이 했다.
취업에 성공하거나, 부트캠프를 참여 중인 이전 기 아기사자들을 꼬셔서 소규모 멘토링도 진행해주기도 했다.
3. 후기
📌 성과 지표
현재 12기 운영진을 선발하기 위해서 여러 아기사자들을 찔러 보고 있다.
(원래는 그 인원들을 모아서 중앙 동아리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으나, 올 한 해 생각 이상으로 내 시간을 많이 빼앗겨 개인 공부를 할 시간이 많이 부족했다고 판단하여 그 꿈은 포기하게 되었다. 소마 떨어지면 하게 될 수도..? )
아무도 안 할 줄 알고 걱정했지만, 지금은 12기 운영진이 10명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지원율이 높다. 오히려 너무 많아질 것 같아서 조절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
그리고 이전과는 달리, 내가 하나하나 인수인계를 통해서 시행착오 과정을 줄여나갈 수 있도록 서포트 해줄 계획이므로 12기는 더 쾌적한 환경에서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멋사 활동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값진 경험이었다고 말씀해주셨다.
하지만 내가 예상한 성과만큼은 달성하지 못 했다. 어쩌면 더 나은 전략들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12기는 적어도 인력 부족과 시간 부족으로 인한 문제는 극복할 수 있게 되었으니, 더 다양한 전략들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자문을 해주는 역할일 뿐이고, 앞으로의 멋사는 내가 없어도 선순환 구조를 이루는 시스템이 구축되길 바란다.
📌 번아웃을 어떻게 피했는가?
밥 먹는 시간과 잠 자는 시간마저 아까워서, 항상 최적의 동선을 짜고 움직였다.
삼각김밥 하나로 하루 식사를 떼우는 건 일상이었고 거르는 날도 많았다. 진짜로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동아리에 생각 이상으로 많은 시간을 빼앗긴 탓에, 그 이상의 노력을 투자해서 개인 공부도 진행했지만
공대 복전이라는 게 생각 외로 날 가만히 두질 않았다.
올 해,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그렇게 살면서 번 아웃이 오지 않았는가?"였다. 사실 딱 한 번 올 뻔한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번 아웃이라는 건, 내가 세운 목표와 걸어가는 길에 대한 의문이 생겨 혼란이 찾아온 사람이나 겪는 일이라 여겼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내가 사는 이유를 자문했고,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 답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잘 컨트롤하고 있었다고 자부하던 감정이 한 번 크게 흔들린 적이 있었고,
5월의 어느 날 진짜로 무너질 뻔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공부는 계속 했다.)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회의감이 느껴졌고, 현재의 내 상태에 대한 불신이 극도로 커져 불안정해져 있었다.
한 번 뒤틀린 감정선은 좀처럼 원상태로 복구가 되질 않았고, 그 상태로 2주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컴공 과목과 화공 과목이 겹쳐서 시간을 조정해야 할 일이 생겼었다.
컴공 과목은 학기 초부터 시간 조정이 어렵다고 당부해두었기에, 화공 교수님께 부탁을 드려야만 했다.
올해 처음으로 이 학교로 오신 나사 출신의 교수님이셨는데, 이전부터 개인적으로 존경하던 분이었다. (스펙이 너무 멋지잖아.)
처음에 현재 상황을 말씀드리고, 시간 조정 가능성에 대해 여쭤보았을 때 교수님께서 "대안을 가져와라. 네가 이 강의를 듣는 200명의 수강생을 설득할 수 있느냐?"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기획/디자인 공부를 할 때 공부했던(요긴하게 써먹었다) As-is/To-be Senario를 통해, 현재 내 상황과 내가 필요로 하는 것,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로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열거하고 가능성있는 대안책과 그 대안책의 문제점, 그리고 그 문제점의 대안책까지 작성해서 교수님께 메일을 작성했었다.
그 결과는 바로 연구실 호출행..나는 여기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교수님을 설득해보일 비장의 각오로 들어섰었다.
그런데 웬걸, 들어가자마자 교수님께서 웃으시면서 "너는 반드시 성공할 거다"라는 말을 해주셨다.
3학년 중에 이 정도의 메일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그러시면서 시험 일정 조정을 순식간에 해결해주시고
내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주셨다.
15분 가량의 대화 속에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순간 아직도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다.
교수님께서 "너는 그 일을 할 때 행복해?"라고 물어보셨을 때, 단 1초의 망설임 없이 "행복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
나는 그 뒤로도 몇 번 더 흔들릴 뻔한 적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그 순간을 되뇌이면서 다행히 번 아웃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근데 이거 멋사랑 상관 없잖아)
📌 내가 개선해야 할 점
멋사 대표 활동을 하면서, "좋은 리더란 무엇인가?"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고민을 했다.
물론 여전히 그 해답을 찾지는 못 했지만, 적어도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항상 아래의 말들을 나한테 되뇌였었다. (내가 지어낸 말..)
- 리더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면, 따르는 사람도 주저하게 된다. 앞에 나서는 이라면 언제나 당당해져라. 그렇다고 그것이 무모하고 오만해지라는 말이 아니다.
- 일은 결국 사람이 한다.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먼저 깨우쳐라. 그 사람이 그 일을 하고 싶게끔 만들어줘야 한다.
- 혼자서 다 해내지 못 할 것 같다면, 주위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라. 그 시간만큼 더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다.
- 내가 아무리 옳아도 그걸 말로 옮길 때는 신중히 해라. 주위에 아무도 남지 않는다면 본인만 손해다.
📌 회고
작년에 대표를 맡기로 했을 때 부터, "적당히만 하는 게 좋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물론, 내가 그 말을 귀담아 들을리가 없었고 전력으로 밀어붙일 때도 옆에선 "뭐하러 그렇게까지 하냐?"라는 말밖에 못 들었다.
내가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는 건 너무 많은 이유가 존재한다.
실패한 사람보단 성공한 사람이 내게 비지니스적 가치가 높다는 속물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고,
모든 분야를 혼자 다 공부할 수는 없으니 각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를 키운다거나,
나와 동등한 수준, 혹은 그 이상으로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육성한다거나,
가르치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메타 인지를 기르는 데 도움이 많이 되기도 한다.
혹은 각자가 자신의 길에서 성공을 거둘 때마다, 나는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분석해서 더 다양한 전략적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모든 사람들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길 바라기 때문이다.
후회라는 건 딱히 곱씹어서 좋을만한 감정이 아니다.
해봐서 아는데, 하루하루가 지옥같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
나는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의 삶의 선택을 긍정한다.
내 주위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웬만하면 내 원수마저도 행복하길 바란다.
그런 나의 이상을 세상에 구현하기 위한 가장 미약한 첫 걸음을 내딛은 것이 바로 올 한 해였다.